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두 개의 스크린, 하나의 전쟁: 한국전쟁을 비추는 국내외 영화의 기억 투쟁

by 디저트사커 2025. 7. 2.
반응형

A symbolic image of a tattered flag, half South Korean Taegukgi and half American Stars and Stripes, lying on the ruins of a Korean battlefield.
태극기와 성조기가 반반씩 갈라져 찢어진 채, 폐허가 된 한국의 전쟁터 풍경 위에 놓여 있는 상징적인 이미지.

‘잊혀진 전쟁’과 ‘잊을 수 없는 비극’ 사이의 간극

한국전쟁은 그것을 기억하는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이름과 무게를 갖는다. 서구, 특히 미국에게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광과 베트남전쟁의 수렁 사이에 끼인, 어딘가 모르게 색이 바랜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으로 종종 호명된다. 냉전 시대의 첫 번째 열전(熱戰)이라는 세계사적 의미는 분명하지만, 그들의 대중적 기억 속에서 전쟁의 구체적인 얼굴은 희미하다. 반면,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민족의 허리를 잘라냈고 수백만 명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결코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될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이처럼 전쟁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차이는 스크린 위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왔다. 할리드를 위시한 해외 영화들이 한국전쟁을 주로 냉전 이데올로기의 대결 구도 속에서 타자화하거나, 전쟁의 부조리를 고발하기 위한 알레고리의 배경으로 ‘활용’하는 경향을 보였다면, 한국 영화는 오랜 침묵을 깨고 200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민족 내부의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아픔의 근원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다룬 국내외 영화를 비교하는 작업은 단순히 서사나 연출의 차이를 나열하는 것을 넘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각기 다른 사회의 기억과 정체성을 통해 어떻게 재구성되고 소비되는지를 살펴보는 ‘기억의 투쟁’을 목격하는 과정이다. 이 글은 이념의 대리전이라는 외부의 시선과 민족의 자화상이라는 내부의 시선이 어떻게 교차하고 충돌하며 한국전쟁의 다층적인 모습을 구축해왔는지 심도 있게 분석하고자 한다.

이념의 대리전 vs 민족의 자화상: 시선의 교차와 충돌

전쟁 발발 직후부터 제작된 할리우드의 초기 한국전쟁 영화들은 명백한 반공주의 선전물의 성격을 띠었다. 사무엘 풀러의 '강철 투구(The Steel Helmet, 1951)'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가진 미군 병사들이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빨갱이(Reds)'들과 싸우는 과정을 통해 공산주의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경고한다. 여기서 한국이라는 공간과 한국인은 미군 주인공의 영웅성을 부각하거나 이념적 대립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러한 외부인의 시선은 시간이 흘러 더욱 정교해지는데, 로버트 알트만의 '매시(M*A*S*H, 1970)'는 그 대표적인 변주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본질은 당시 한창이던 베트남전에 대한 통렬한 풍자였다. 군대의 권위주의와 전쟁의 광기를 조롱하는 블랙 코미디의 수작으로 평가받지만, 영화 속에서 한국전쟁 자체의 비극이나 한국인의 고통은 철저히 소거되어 있다. 즉, 한국전쟁은 그 자체로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미국의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편리한 무대 장치로 기능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의 여러 영화에서도 반복되며 ‘잊혀진 전쟁’이라는 국제적 인식을 더욱 공고히 했다. 반면,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한국의 전쟁 영화들은 이념의 거대 담론 대신, 그 속에서 갈가리 찢겨 나간 개인과 가족의 서사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2004)'는 남과 북이라는 이념적 선택 이전에, 동생을 지키려는 형의 원초적인 가족애가 어떻게 전쟁의 광기 속에서 파괴되는지를 보여주며 천만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여기서 이념은 민족을 분열시키고 형제에게 총을 겨누게 만드는 비극의 근원으로 작동한다. 장훈 감독의 '고지전(2011)'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단 한 뼘의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무의미한 전투를 반복하는 최전방의 병사들을 통해, 남과 북 모두 전쟁의 명분을 잃고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상황을 그린다. ‘우리가 왜 싸우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며 적과 아군의 경계가 흐려지는 모습은, 외부의 시선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민족 내부의 깊은 회의와 상처를 예리하게 포착한 결과물이다.

기억의 봉합과 영화의 역할: 상처를 넘어 미래로

결론적으로 한국전쟁을 다룬 국내외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전쟁의 주체'를 누구로 설정하느냐에서 비롯된다. 해외 영화, 특히 할리우드 영화 속 전쟁의 주체는 대부분 미군이며, 그들의 시선으로 본 한국전쟁은 이념을 수호하기 위한 머나먼 이국에서의 사투, 혹은 부조리한 상황의 연속이다. 하지만 한국 영화 속 전쟁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얼굴을 한 형제, 친구, 이웃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피할 수 없는 비극의 당사자다. 이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는 스크린 위에 전혀 다른 감정의 결을 만들어낸다. 한쪽이 이념과 생존의 드라마에 집중한다면, 다른 한쪽은 분단과 이산, 그리고 한(恨)의 정서에 천착한다. 어느 한쪽의 시선만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전쟁이 냉전이라는 국제 질서 속에서 발발한 대리전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과, 동시에 한 민족이 서로를 죽고 죽여야 했던 내전이라는 점은 모두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비극의 총체는 이 두 가지 측면이 교차하는 지점에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들이 쏟아낸 전쟁 서사들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을 넘어선다. 그것은 반세기 동안 이념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말할 수 없었던 우리 내부의 상처를 공론장으로 끌어내고, 젊은 세대에게 '잊혀진 전쟁'이 아닌 '우리의 전쟁'으로 말을 거는 적극적인 '기억의 봉합' 시도이다. 영화는 과거를 치유하거나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만, 흩어진 기억들을 한데 모아 공동의 성찰을 이끌어낼 힘을 가졌다. 분단의 상처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을 다루는 영화적 시도들은 과거를 넘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모색하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도 절실한 작업으로 계속될 것이다.

반응형